전망대에서 안국사까지
전망대 -> 치목마을 탐방로 입구(동문지 추정) -> 안국사 -> 호국사비 -> 안렴대 前(남문지 추정)
아침 9시 30분 적상산성 복원과 관련해 관계자들과 함께 산길에 올랐다. 일상생활을 벗어나 단순히 여행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롯이 산성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답사의 성격을 가졌다. 무주문화원에서 산행에 동행하자는 얘기를 전해왔고 기분이 좋아 흔쾌히 함께 했다. 지역에서 나고 자랐지만 적상산성은 서창탐방로의 서문과 안국사 앞에 성곽을 보는 게 전부였다. 허가된 탐방로와 관광지를 제외하곤 산성전체를 돌아보는 건 처음이기에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산 지형에 따라 산성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얼마나 보존되어있고 무너졌는지, 그 흔적은 있는지 모든 게 궁금했다. 인터넷 검색으로만 알고 있는 적상산성의 연원과 중요성, 본적 없는 산성의 흔적들을 찾아 두 눈으로 직접 본다니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적상산 초입의 북창마을을 지나 고불고불한 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졌다. 올라가는 길 이곳저곳 어김없이 봄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낙들의 치맛자락처럼 분홍색 진달래꽃이 나풀거리고 노란 생강 꽃들이 반짝였다.
무주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적상산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산으로 유명하다. 산 하나에 얽힌 많은 역사적 콘텐츠와 관광자원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 가운데도 단연 조선왕조실록과 적상산성을 꼽을 수 있겠다.
오늘은 전체 성곽과 주변 탐방로를 둘러볼 계획이다. 산성은 원형을 유지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어 두 눈을 크게 뜨고 발걸음을 옮겨본다. 전망대 옆 괴목리 방면을 시작으로 성곽의 흔적을 따라 가본다. 천 길 낭떠러지인 정상부 경계를 따라 돌무더기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산성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높낮이 없이 평탄한 길이어서 어렵지 않게 걸었다.
사적 제146호. 지정면적 214,975㎡, 둘레 약 3,000m. 현재 북문지·서문지 및 사고지(史庫址)가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산성은 석축으로 둘레 1만6920척, 높이 7척이었으나 이제는 폐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성내에는 비옥한 토지가 있었고 못이 4개소, 우물이 23개소 있었다.1612년(광해군 4)에 실록전(實錄殿)이, 1614년에 사각(史閣)이, 1641년(인조 19)에 선원각(璿源閣)·군기고(軍器庫)·대별관(大別館)이 1643년호국사(護國寺) 등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별장·참봉·승장 들이 거느리는 무리에 의하여 수호, 보존되었다.성벽은 무너져서 숲 사이에서 겨우 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사각과 기타의 건물들도 그 터만이 남아 있다. 불과 90여년 전만 하더라도 사각 등의 수리를 위하여 고종이 수리비를 지급하였다는 사실이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이 성이 있는 상산(裳山)은 상성산(裳城山)이라고도 하는데 호남에서 영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요로이기도 하였으며, 산 가운데에는 넓은 분지가 있다.고려 말에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 인근 수십여 곳의 군현이 도륙되었는데도 여기에 사는 주민들만은 그 참화를 면하였다고 한다.최영(崔塋)은 이 곳에 산성을 축조하고 창고 짓기를 건의하였으며,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崔潤德)도 이곳을 살펴본 뒤 반드시 축성하여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 말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언뜻 보면 돌무더기지만 자세히 보면 성곽이다. 간혹 성곽의 흔적을 찾다 갈 길을 잃었지만 대부분의 돌무더기는 그 흔적을 찾기에 충분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걷다가 치목마을 탐방로 방면으로 향했다. 평지가 보이는 치목마을 탐방로 입구는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간간이 깨진 기와와 밥그릇 조각들이 눈에 보이기도 하였으며 시대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이곳에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발길을 옮기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연장선상의 돌무더기를 찾기는 어려웠다. 계곡을 따라 성곽이 있었을 거라 추측하고 주변을 살펴본다. 안국사 앞에 줄지어 있는 성곽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놓쳤던 흔적을 안국사 일주문을 시작으로 반대방향으로 내려가 그 흔적을 찾아봤다.
안국사 앞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멀리 눈에 덮힌 덕유산과 괴목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곽은 호국사비를 지나 길게 이어진다. 멀리 안국사 해우소가 보이는 지점에서 또다시 성곽은 끊어진다. 계곡 밑 우거진 나무숲 어딘가에 흔적이 있을 것 같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지점을 건너뛰고 위로 올라가 남문지 추정 지점부터 성곽의 흔적을 쫓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는 바위와 바위 사이에 적들이 올라올 수 있는 부분만 돌을 쌓아 놓은 모습이 보였다. 중간에 낭떠러지가 있는 곳은 성곽을 쌓지 않고 자연을 최대한 활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안렴대에서 북문까지
안국사 -> 안렴대 -> 서문지 -> 향로봉 -> 망원대 -> 북문지 -> 주차장
오전보다 힘들게 느껴지는 오후 산행이다. 숨이 가쁘고 땀방울이 맺혔다. 저 멀리 마산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안렴대에서 보이는 탁 트인 광경은 가히 자연이 빚은 예술이라 할만하다. 산과 들, 내, 푸른 하늘의 풍경은 힘든 산행에 반가운 선물 같았다
안렴대(按廉臺)는 고려 시대 거란병이 침입했을 때 삼도의 안렴사(按簾使)가 피난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치즈 한 조각을 떼어 놓은 모양의 안렴대 바위 밑 좁은 틈이 보였다. 궁금증이 생겨 바위틈으로 나 있는 길을 비집고 들어갔다. 난을 피해 실록을 옮겨와 숨겼다고 전해지는 곳이라 한다. 천 길 낭떠러지 바위틈 동굴이야 말로 기가 막힌 보관 장소인 것이다. 안렴대를 몇 차례 와 봤지만 직접 석실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일행은 안렴대를 벗어나 탐방로를 따라 서문으로 향했다. 서문을 가는 길목에는 노란 꽃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여름매미꽃으로 불리는 노란 피나물 군락지로 봄(3~4월)이 되면 노란 꽃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등산화가 아닌 일상화를 신고 오래 걸었더니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발가락에 힘을 주며 조심히 한발 한발 땅을 디뎠다. 멀리 서문지가 보였다.
서문지를 따라 길게 이어진 성곽들도 위용을 뽐낸다. ‘용담문’으로 불리는 서문은 규장에 소장된 ‘적상산성조진성책’에 의하면 2층 3칸의 문루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지금 서문의 모습도 좋지만 당시의 문루가 후대에 전해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4대문 중 하나 남은 북문을 향해서 다시 오르막을 오른다. 따가운 햇살아래 적상산 서쪽능선을 따라 오르는 산행은 땀과 거친 호흡만이 남았다. 발은 낙엽으로 인해 푹푹 밑으로 꺼지고 힘은 두 배, 세 배로 들었다.
길을 올라가다보면 길게 이어진 성벽이 있다가도 사라지고, 뚝 끊겨 낭떠러지로만 이어진다. 또 듬성듬성 돌무더기가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르길 한참 향로봉(1025m)에 도착했다. 참고로 적상산의 최고 봉우리는 1054m로 통신탑이 있는 곳이다.
한참을 걷다보니 모두들 지쳐있었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물을 축이며 잠시 쉬어간다.
향로봉을 지나 그늘이 드리워졌다.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망원대로 향한다. 망원대는 주 능선에서 삐죽 나온 바위로 아찔한 외길로 이어진다. 성인 5명 정도가 서 있을 정도로 좁은 곳이다. 읍내에서 바라보는 망원대 지점은 적상산을 둘러싸고 있는 기암절벽 맨 왼쪽이다.
망원대는 적상면과 무주읍, 멀리는 금산까지 보이는 뻥 뚫린 시야를 자랑한다.
적상산의 최고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 있다면 남쪽의 안렴대와 북쪽의 망원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쉽게도 일행 중 일부는 고소공포증으로 그 아름다운 전망을 못 본채 발길을 돌렸다.
일행은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갈 때 쯤 적상산성 북문지를 향해 서둘렀다.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경계지점을 따라가면 간혹 돌무더기 보였다. 흔적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니 길게 뻗어진 성곽이 보였다. 북문이었다. 북문은 당시의 성문의 흔적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낙엽과 함께 많은 기왓장 조각들이 보였다.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웅장했던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선왕조실록은 북창마을을 따라 이 곳 북문을 통했다고 한다. 많은 행렬과 궤짝을 실은 말들이 이 곳으로 지나갔을 것이고 그 역사적인 곳에 내가 서있다. 그 시대를 상상하며 기분이 묘했다.
북문지는 투박하지만 무엇보다 견고하고 웅장함이 적상산의 산세와 많이 닮아있었다. 출입구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기역자 모양으로 한 번 꺾여 들어오게 하는 모양새다. 바로 들어올 수 없게 경계하는 듯 했다.
적상산성의 북문은 4대문 가운데 정문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조선 인조 18년(1860)에 전라감사 원두표가 쌓고 영사를 넓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북문을 끝으로 상부댐 주차장으로 하산했다. 내내 마음 한 곳에 궁금증이 있었는데 4대문과 성곽의 흔적을 직접 둘러보니 속이 시원해졌다.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문화를 품고 있는 적상산을 조금 더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옛것의 흔적은 사라진다. 지역의 뿌리인 역사적 자원을 방치하는 것 같아 내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 곳의 흔적들을 찾아내고 복원하는 데에 힘을 쓰는 관계자들 모습에 기쁘게 생각한다.
멀어져 가는 산성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몸은 힘들지만 가슴 한 켠에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었다. 기분 좋은 하루를 마칠 수 있어 산행을 함께한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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